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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 자리마다
작성자 : bha1070   작성일 : 2018-02-06   조회수 : 2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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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 자리마다 

 

박미용

 

오늘도 새벽을 여는 마당 쓰는 소리

베란다 문을 여니 새초롬해진 날씨의 입김이 아침을 맞이하는 문틈을 훅 들어온다. 아침풍경이 4월의 어느 날가 오버랩 된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어둑어둑해지는 저물녘까지 내리던 날이였다. 열린 문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빗소리가 친구의 목소리처럼 다정하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불어오는 바람에 눈처럼 하얗게 내려 쌓인 그 위로 비가 내렸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내던 소리가 저 쌀은 꽆잎 때문이었나 보다.

미처 쓸어내지 못한 꽃잎이 비에 버무러진 맛이 일품인지 수다스런 참새 떼의 고개 짓이 바쁘다. 마당에서 올려다 본 아카시아나무의 향기롭던 하얀 꽃은 다 떠나가고 연두 빛 수줍던 잎새가 초록 정장차림으로 멀끔하다. 그 연한 순 같던 잎들이 그새 짙어 온통 초록이다. 많은 계절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피었다가는 지고 또 저마다의 열심히 더러는 씨앗으로 더러는 열매로 자리를 비워준다. 잎새들도 갖가지의 초록빛을 자랑하며 자연은 소리도 없이 분주하다.

비워낸 자리가 허전할 틈도 없이 채워지는 시간의 변화 속에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서 있다. 자연은 고속철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나는 껍데기도 없는 민달팽이처럼 느리고 약하다.

유행지난 낡은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둔 옷장처럼 내려놓아야 할 마음 조각의 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바람과 함께 귓불을 어루만진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엄마의 바람이 아이들에게 버거운 것은 아니었는지 사랑이라고 말하며 기대오는 아내의 무게에 입이 무거운 남편의 어깨가 걸려있지 않았는지. 또한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며,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듣고 싶은 댈만 들으려 하며 나도 숨이 가쁘지는 않았는지.

하얀 울타리 가득 숞았던 핑크빛 불이 사랑으서운 장미도 시나브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떠한 그 자리에 가을의 음색을 들려주려는 듯 나팔꽃이 나팔수처럼  경건한 연주를 하고 있는 오늘도 비가 잠깐 지나갔다.

이 비를 양분 삼아 성장하던 초록이 이제는 이 늦은 비에 취하 붉은 얼굴로 쉬어가지 손 내민다. 울긋불긋 색동 옷 차려 입고 같이 신명나게 어울려 보자 하는데, 인어공주의 지느러미처럼 육지에서는 약한 다리로 가까이 다가설 수 없지만 그 손 덥석 잡고 서글프려던 마음 한 자락 쯤 싹둑 잘라낸다.

만사농엽이 권하는 탁주 한 사발에 흠뼉 취해 본다, 그리고 마음 속 켜켜이 쌓아두었던 미련과 욕심의 찌꺼기들을 냉장고에서 꺼낸 까만 봉지들 정리하듯 가지치기 해 보려 한다.

가을 하늘이 청며안 옥 같은 아침에 또다시 마당 쓸어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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